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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멕시코 페소 위기(테킬라 위기): 개방경제의 그림자 자유무역과 자본 개방의 빛과 그림자1990년대 초반, 멕시코는 신자유주의 개혁과 글로벌화 전략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카를로스 살리나스 대통령 하에서 추진된 구조개혁은 국영기업의 민영화, 재정건전화, 무역자유화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장 상징적인 결과는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발효였다. 이를 통해 멕시코는 북미 경제권의 일원으로 편입되며 외국인 투자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으로 막대한 해외자본이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개방정책은 단기 외화 유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를 만들어냈으며, 자본 이탈 가능성에 대한 대비는 미흡했다. 멕시코 정부는 외국 자본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지속했고, 환율은 달러화에 연동된 페그제 형태로 유지되.. 2025. 7. 11.
1982년 라틴아메리카 외채 위기: 과도한 차입이 불러온 신흥국 경제 붕괴 오일 쇼크와 라틴아메리카의 외채 급증1970년대 초, 세계 경제는 두 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로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1973년과 1979년 석유 가격이 폭등하면서,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았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급격한 경상수지 악화에 직면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 국가는 외국 자본에 의존하게 되었고, 국제 상업은행과 금융기관들은 유동성이 풍부한 중동 산유국의 자금을 기반으로 라틴아메리카에 대규모로 대출을 제공했다. 당시에는 낮은 금리와 고성장 기대로 인해 차입 확대에 대한 경계심이 낮았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이를 기회로 인식해 인프라 개발, 산업 육성, 도시화 프로젝트에 자금을 집중 투입했다. 그러나 이 같은 외채 의존적 성장 모델은 본질적으로 취약한 구조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차.. 2025. 7. 10.
1971년 닉슨 쇼크: 금과 달러의 연동 중단과 변동환율 시대 개막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통화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역사적 합의였다. 이 체제는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한 금환본위제 구조를 기반으로, 미국 달러는 금(1온스당 35달러)과 교환 가능하며, 다른 나라의 통화는 달러에 고정되는 방식이었다. 전후 미국은 금 보유량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었고, 생산력과 수출력에서도 압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 시스템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의 재정 상황은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장기화, 케네디와 존슨 정부의 복지 지출 확대는 막대한 재정 적자를 유발하였고, 이는 달러 공급 과잉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자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와 해외 유동성 과잉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 2025. 7. 9.
1987년 '블랙 먼데이' 전조 없는 폭락, 1987년 10월 19일1987년 10월 19일 월요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는 역사상 유례없는 주가 폭락이 발생했다. 이날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단 하루 만에 22.6% 하락했는데, 이는 미국 주식시장 역사상 최대 단일 일간 하락률로 기록되어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날의 충격은 단지 미국에 그치지 않았고, 아시아와 유럽 시장도 연쇄적으로 폭락하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이 동시에 붕괴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사건은 ‘블랙 먼데이(Black Monday)’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 주식시장을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인식과 금융 기술의 발전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 뉴욕 증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점진적인 조정을 겪고 있었지만, 폭락의 전조가 명확하게 포착되지는 않.. 2025. 7. 8.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고정환율제와 외채 의존 구조의 불안정성1990년대 초중반 동아시아 국가들은 빠른 경제 성장과 함께 국제 금융시장에서 '아시아의 기적'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한국 등은 높은 성장률과 투자 유입으로 신흥 경제국으로 부상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면서도 외국 자본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적인 취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달러에 연동된 고정환율제는 환율 리스크를 낮추는 대신, 자국 통화가 과대평가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는 수출 경쟁력 저하와 외환보유액 감소로 이어졌다. 더욱이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면서 국제 자금은 다시 미국으로 회귀했고, 이는 신흥국에 대한 자본 유입 둔화로 나타났다. 아시아 국가들은 단기 외채를 늘려 경상수지 적자를.. 2025. 7. 8.
2008년 금융 위기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금융상품의 복잡화에서 비롯된 금융 위기2008년 금융 위기의 발단은 미국의 주택시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저금리 정책과 주택담보대출 완화는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촉진했다. 금융기관들은 소득이 불안정하거나 신용등급이 낮은 계층에게도 적극적으로 주택담보대출을 해주었으며,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이 대출들은 고위험 상품이었지만, 이를 여러 대출로 묶어 만든 부채담보부증권(CDO) 등은 신용평가사로부터 높은 등급을 받아 전 세계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에게 팔렸다. 이 과정에서 리스크는 은폐되고 분산되었으며, 다수의 기관이 이 상품에 투자함으로써 위험 노출이 확대되었다. 특히 파생상품인 CDS(신용부도스왑)의 활용이 늘어나면서, 투자자들은 채권이 .. 2025. 7. 8.
2020년 WTI 원유 선물 가격의 마이너스 전환 팬데믹 충격과 수요 붕괴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 실물 경제에 극심한 충격을 주었고, 그중 가장 직격탄을 맞은 산업 중 하나가 에너지 산업이었다. 봉쇄 조치와 이동 제한으로 항공, 해운, 육상 운송이 대폭 감소했고, 전 세계 원유 수요는 하루 약 3,000만 배럴 이상 줄어들었다. 미국, 유럽, 아시아 할 것 없이 정유소는 가동률을 줄였고, 항공사들은 항공편을 90% 이상 감축했다. 이처럼 실물 수요가 급감하는 와중에도, 원유 생산량은 단기간에 줄지 않아 시장에선 심각한 초과 공급이 발생했다. 특히 미국 내 원유 생산은 셰일 혁명 이후 꾸준히 증가한 상태였고, 수요 붕괴와 맞물리면서 유례없는 재고 누적 현상을 낳았다. 이 시기 세계 최대 원유 저장시설 중 하나인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쿠싱.. 2025. 7. 6.
1992년 영국 금융위기 '블랙 웬즈데이'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과 영국의 가입 배경1990년 영국은 유럽 통화 통합의 일환으로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가입하였다. ERM은 각국 통화 간 환율 변동폭을 ±2.25% 이내로 제한하여 유럽 내 경제 안정성과 통화 일체감을 높이는 제도로, 향후 유로 도입의 기반이 되는 정책이었다. 당시 영국 보수당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고 금융시장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ERM 가입을 강력히 추진했으며, 파운드화는 1마르크당 약 2.95마르크의 기준 환율로 시스템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영국 경제는 이미 경기 침체기에 있었고, 다른 ERM 회원국들과는 경제 조건이 상당히 달랐다. 영국은 금리를 높게 유지하고 있었으며, 실업률 상승과 부동산 시장 침체 등으로 내수 경제의 활력이 낮은 상태.. 2025. 7. 6.
1826년 미국 금융 공황 1820년대 미국은 시장경제 확장과 함께 상업적 낙관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였다. 운하 건설, 철도 계획, 은행 설립, 제조업 투자 등에서 민간 자본의 유입이 크게 증가했으며, 특히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한 금융 허브들은 일종의 ‘기업 붐’을 경험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상장 요건이 명확하지 않았고, 투자자 보호 장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신생 기업들이 허위 혹은 과장된 정보를 내세워 자금을 모집하는 일이 흔했다. 대표적인 예로, 여러 주식회사가 실제로는 운영되지 않거나 실체가 모호한 사업 계획만으로도 대중으로부터 수많은 투자를 유치하곤 했다. 이 같은 투기적 환경에서, 투자자들은 기업 실적보다 소문에 의존해 주식을 사고파는 일이 잦았고, 이는 금융 시스템 전반의 내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 2025.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