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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금융의 역사

1890년 배링 사태: 남미 채권으로 인한 런던의 위기

by info-now-blog 2025.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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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링 사태: 남미 채권으로 인한 런던의 위기

19세기 후반은 영국이 세계 금융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런던은 국제 자본이 집결하는 허브로, 전 세계 신흥국들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찾는 중심지였습니다. 이 가운데 남미 국가들, 특히 아르헨티나는 유럽 자본의 주요 수혜국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농업 잠재력, 철도 인프라 확장 계획 등으로 인해 외국인 투자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고, 실제로 유럽의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었습니다. 특히 철도 건설, 항만 개발, 통화 시스템 개선과 같은 산업 기반 투자에 채권 형식으로 대량의 자금이 투입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런던의 주요 투자은행 중 하나인 배링 브라더스(Baring Brothers)는 아르헨티나 관련 채권과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하게 됩니다. 배링은 당시 가장 평판이 높은 영국의 금융기관 중 하나로, 왕실과 정부의 금융 업무도 담당할 만큼 신뢰받던 은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배링은 1880년대 후반부터 아르헨티나 정부와 지방 자치단체, 민간 철도회사의 채권을 과도하게 인수하면서 자산구조가 특정 지역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위험한 포트폴리오를 갖게 됩니다. 이러한 투자 전략은 아르헨티나 경제가 지속적인 성장을 할 경우에는 막대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정치적·경제적 불안이 발생할 경우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아르헨티나 정정 불안과 금융 불확실성의 확대

1890년 아르헨티나에서는 급격한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겔 후아레스 셀만(Miguel Juárez Celman)의 독재적 통치와 부패는 대중의 반발을 불러왔고, 이는 레볼루시온 델 파르케(Revolución del Parque)로 알려진 시민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정부는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긴축 정책과 함께 외채 상환 유예를 선언했고, 이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특히 아르헨티나 정부와 기업들이 발행한 채권을 대량 보유하고 있던 배링 브라더스는, 채권 가치가 급락하면서 유동성 압박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르헨티나 페소화는 급격히 평가절하되었고, 국채 수익률은 폭등하며 신용경색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배링은 외화 상환이 불투명해진 채권을 처분하지 못했고, 유럽 시장에서도 아르헨티나 관련 자산에 대한 수요가 완전히 증발해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배링은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없게 되었고, 기존 부채를 갚지 못할 가능성이 현실화되었습니다. 배링의 부실은 다른 은행들과 투자자들에게까지 신뢰 위기로 확산되었고, 런던 금융가는 갑작스럽게 전반적인 유동성 부족 사태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배링과 거래하던 소규모 은행과 브로커들은 줄줄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며 금융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영란은행과 국제 금융가의 공동 구조

배링 브라더스의 위기는 당시 영국 금융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배링은 대형 국채 딜과 중앙정부 거래를 담당하던 핵심 기관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민간 금융기관이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SIFI)로 여겨졌습니다. 배링이 파산하게 되면 투자자 신뢰가 붕괴되고, 대외 신용도 하락, 금융 시장 금리 급등, 기업 자금조달 경색 등 연쇄적인 경제 충격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인지한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은 긴급히 대응에 나섰습니다.

 

영란은행은 런던 시티의 주요 은행들과 협력하여 "배링 구조 위원회"를 구성하고, 약 1,700만 파운드 규모의 구제 금융 컨소시엄을 조직했습니다. 이 중 상당 부분은 다른 대형 금융기관들이 공동 출자한 형태였고, 일부는 유럽 대륙의 은행들, 심지어는 로스차일드 가문까지도 참여하는 국제적 공동 대응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배링은 공식적으로 파산하지 않고, 기존 파트너들이 새로운 법인(Baring Brothers & Co. Ltd.)을 설립하여 자산을 정리하고 채무를 관리하는 형태로 구조조정에 들어갔습니다. 이 위기는 영란은행이 금융시장 안정화를 위해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을 공식적으로 수행한 초기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배링 사태가 남긴 교훈과 금융사적 의미

1890년 배링 사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현대 글로벌 금융 위기의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됩니다. 먼저, 특정 신흥국에 대한 과도한 신용 공급과 투자 쏠림 현상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제2의 미국'으로 불릴 만큼 낙관적 전망이 넘쳤지만, 정치 불안과 제도적 미성숙은 외국인 자본을 일거에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현실을 입증했습니다. 이는 훗날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나 2001년 아르헨티나 디폴트 등과 유사한 구조를 지닌 금융 불안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또한, 배링 사태는 국제 금융 시스템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한 국가 혹은 한 기관의 위기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를 이미 19세기에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각국 중앙은행들 사이의 협력 필요성과, 신흥국 채권에 대한 리스크 평가 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영란은행과 민간 금융기관들이 공동으로 위기를 수습했던 구조는 훗날 IMF나 BIS, G20 금융안정위원회(FSB) 등 국제 금융 거버넌스 논의의 사상적 토대로 작용했습니다. 배링 사태는 단순한 파산 사건을 넘어서, 현대 금융 체계의 위기 대응 모델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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