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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투자 역사

2020년 WTI 원유 선물 가격의 마이너스 전환

by info-now-blog 2025.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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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충격과 수요 붕괴

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 실물 경제에 극심한 충격을 주었고, 그중 가장 직격탄을 맞은 산업 중 하나가 에너지 산업이었다. 봉쇄 조치와 이동 제한으로 항공, 해운, 육상 운송이 대폭 감소했고, 전 세계 원유 수요는 하루 약 3,000만 배럴 이상 줄어들었다. 미국, 유럽, 아시아 할 것 없이 정유소는 가동률을 줄였고, 항공사들은 항공편을 90% 이상 감축했다. 이처럼 실물 수요가 급감하는 와중에도, 원유 생산량은 단기간에 줄지 않아 시장에선 심각한 초과 공급이 발생했다. 특히 미국 내 원유 생산은 셰일 혁명 이후 꾸준히 증가한 상태였고, 수요 붕괴와 맞물리면서 유례없는 재고 누적 현상을 낳았다.

 

이 시기 세계 최대 원유 저장시설 중 하나인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쿠싱(Cushing) 허브는 빠르게 포화 상태에 도달했다. 원유는 단순한 금융 자산이 아니라 실물 인도 계약이 포함된 상품이기 때문에, 저장소가 부족한 상황에서 계약 만기를 맞이한 트레이더들은 원유를 실제로 인도받아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된다. 평소에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만기 이전에 선물을 청산하거나 롤오버하지만, 2020년 4월에는 시장의 유동성 부족과 저장 공간 한계 때문에 매도조차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배경이 바로 마이너스 유가라는 비정상적 현상이 발생한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WTI 원유 선물 가격의 마이너스

 


WTI 5월물 선물 가격의 붕괴

2020년 4월 20일, 미국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5월물 선물 가격은 장 마감 직전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권에 진입했다. 이는 만기일 하루 전의 거래로, 실제 원유를 인도받게 되는 날짜가 임박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날 오후, WTI 5월물은 -40.32달러까지 폭락하며 마이너스 300% 이상의 변동성을 기록했다. 이는 단순한 가격 하락이 아닌, 투자자들이 돈을 주고라도 원유를 떠안기 싫어한 상황을 의미했다. 즉, 실제로 계약을 통해 원유를 받아야 하는데 이를 저장할 공간이 없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포지션을 청산하고자 하는 압력이 극대화된 결과였다.

 

현물 인수 의무가 없는 금융 기관이나 일반 투자자들은 WTI 선물 거래에 있어 물리적 인도보다는 차익 거래를 목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보통 만기 전 롤오버를 통해 계약을 연장한다. 그러나 2020년 4월 당시에는 유동성이 급격히 말라붙었고, 신규 매수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아 롤오버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다. 더욱이 쿠싱 지역의 저장 능력은 76% 이상이 이미 차 있었고, 많은 계약자들이 실제 물량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황 매도가 발생했다. 이때문에 WTI 5월물은 순식간에 마이너스 가격대까지 떨어졌으며, 이는 원유 선물 시장 역사상 유례없는 초유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국제 금융시장과 상품시장의 충격

WTI 가격의 마이너스 전환은 전 세계 금융시장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원유를 기초 자산으로 삼는 상장지수펀드(ETF) 및 파생상품에 투자한 개인 투자자들은 큰 손실을 입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미국의 'USO(United States Oil Fund)' ETF가 있으며, 이 상품은 대량의 WTI 근월물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급격한 손실을 입고 포트폴리오를 대규모로 조정해야 했다. 또한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의 개인 투자자들도 CFD(차액결제거래)와 ETN을 통해 원유 선물에 투자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외 많은 개인이 이 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금융당국과 거래소들은 선물시장 구조에 대한 재검토에 착수하게 되었다. CME(시카고상품거래소)는 WTI 선물의 마이너스 가격 수용 시스템을 다시 점검하고, 거래 제한 폭 조정 및 리스크 관리 지침을 새롭게 도입하였다. 또한 이 사건은 상품시장에 대한 투자자의 접근 방식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단순히 가격 상승에 베팅하는 방식이 아닌, 롤오버 비용과 실제 물류 기반에 대한 이해 없이 투자에 나서는 것은 큰 위험을 수반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원유 선물은 실물 상품이라는 특성을 지니며, 단순한 금융 상품으로 접근할 경우 예기치 못한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교훈이 시장 전반에 공유되었다.


이후 회복과 제도적 대응

마이너스 유가라는 전례 없는 충격 이후, 시장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2020년 하반기부터 OPEC+가 공급을 줄이는 합의를 이끌어냈고, 미국 내 생산도 급격히 감소하면서 원유 수급의 균형이 조금씩 회복되었다. 백신 개발과 함께 경제 정상화 기대감이 커지며, 2021년부터는 WTI 가격이 꾸준히 상승세로 전환되었다. 다만 투자자들은 여전히 2020년 4월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원자재 시장의 극단적 변동성에 대비하는 새로운 전략 수립이 요구되었다. 일부 자산운용사들은 선물 만기 구조를 변경하거나, 분산투자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글로벌 금융 시스템과 실물 경제의 연결성에 대한 이해를 다시금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금융화(financialization)가 극도로 진전된 현대 시장에서는 실물 수급과 금융 포지션의 미스매치가 예기치 못한 위기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후 미국 에너지정보청(EIA)과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등은 관련 보고서에서 선물시장과 현물시장 간의 긴밀한 연동성 유지와 투기성 거래의 감시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2020년 WTI 마이너스 유가는 단순한 에너지 이슈가 아니라,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이 가진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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